어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김주열 열사의 이야기가 전파를 탔습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있었던 부정선거에 항의를 하는 시위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김주열 열사의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서 전파를 타자 우리는 왜 이러한 이야기를 이전까지 듣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처참하였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아직 어린 학생에 불과하였습니다.
그에게 최루탄을 쏘아서 그의 얼굴에 박히게 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인 박종표 경위는 그러한 김주열 열사의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서 학생이 죽은 것에 대해서 그 어떠한 죄책감 하나 없었습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성가신 문제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선거가 있던 날 이승만 이기붕의 자유당 정부는 부정선거를 하기 위해서 힘을 썼고 그것을 알게 된 당시 민주당 쪽 사람들과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였으며 당시 마산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 중에 끼어 있었던 김주열 열사는 얼굴에 최루탄 불발탄이 박혀 있는 상태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마산경찰서는 그를 바다로 버렸지만 27일만에 다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그대로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러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과 이후에 있었던 지속적인 사망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315 부정선거는 그대로 419 의거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김주열 열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하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근대 이후 현대까지의 역사가 제대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학생들에게 확실하게 교육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다시는 같은 범죄를 겪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의 이한열,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는 다행스럽게도 역사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방송 매체를 통해서 지금까지 잘 알려져오고 있지만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기간 동안 자행된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아직까지 잊혀진 채로 돌아오지 못한 기억 망실의 속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과거 그 때를 위해서 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라도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래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들은 김주열 열사의 이야기가 내년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는 부디 "꼭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