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5 - [Leben] - 요한 사도의 작은 책, 그리스도 제자 위로를 얻는 이유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3-6)
요한계시록 11장 1절 그리고 2절은 뒤엣 구절과 전혀 다른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나오는 두 증인의 확실한 정체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해가 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즉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인해서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강력한 능력을 보일 수 있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교회를 예표하는 두 증인은 엘리야의 능력과 모세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하늘을 닫아 예언하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였고 모세처럼 물이 피가 되게 하거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내린 이집트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재앙들을 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 예언을 하다가 결국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과 싸워서 결국은 죽게 되었고 그들이 죽은지 3일 반만에 그들은 다시 살아나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지만 두 증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며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처럼 세상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즉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과 짝하며 세상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즉 세상의 가치에 교회가 부화뇌동을 하고 있다면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척을 지더라도 세상의 악을 악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의 가치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가치, 공의와 정의,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며 그것을 또한 가르치고 선포해야만 합니다.
당연히 교회는 핍박을 받게 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 사라짐은 잠깐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 그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알아주시고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 2)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선지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이미 네로 시대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들 중에 수장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던 사도 요한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바로 죽음의 섬 밧모섬이었습니다. 그렇게 낙심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묵시를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전의 뜰처럼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은 자 즉 젖어 있지 않은 자를 찾으시며 그들을 측량하십니다. 즉 그들을 지켜보시고 그들을 하나씩 세신바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죽게 되더라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떠나더라도 자신의 순전함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수를 세신바 되었으며 그들을 지켜보시며 결국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네로 황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처럼 고난의 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때도 아니며 배반하면 살려준다고 하는 그런 척박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내야 합니다. 당시 즉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그들의 삶으로 그들의 믿음을 증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죽임을 당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의 수를 세신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세상의 백성인지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은 더 이상 핍박이 없기에 내 자신이 내 믿음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제자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 자신을 증명해내야만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7-19)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스스로를 부자라 생각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이 없는 자이다. 그렇기에 너 자신을 겸비하고 세상과 짝하지 말고 세상의 길로 가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세신바 된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니면 성전의 뜰처럼 이미 세상에 밟힌바 된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세상 속의 사람인지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잘 보지 못할 것 같으면 안약을 사서 보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두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증인을 핍박하는 그 세상 사람들과 같은 편에 있는 사람들로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의 수를 세시려고 하고 있습니다.